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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립과 발전, 장수왕,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by 최미화 2026. 10. 24.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끈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 동가강 유역에서 건국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국내성(통구)으로 천도하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평야지대로 진출하는 한편, 중국이 설치한 한사군과 투쟁 과정에서 강대해졌습니다. 

 

1. 고구려의 성립, 발전과 멸망

고구려의 성립 : 태조왕 때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현도군을 축출하고, 요동군과 낙랑군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키면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또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후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 상속세를 마련하고, 5부의 행정 구역을 설정하는 등 왕권을 보다 강화하였습니다. 4세기 초 미천왕 때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고구려의 발전 : 고구려 발전기의 왕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4C 소수림왕 :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했습니다.<불교공인> 백제 : 침류왕(4C), 신라 : 법흥왕(6C)

5C 광개토대왕 : 강력한 북진 정책으로 요동, 부여, 말갈을 차지하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고 한강 이북으로 진출했습니다. <전성기> 백제: 근초고왕(4C), 신라 : 진흥왕(6C)

장수왕 : 평양으로 천도해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했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오늘날에 되살릴 수 있을까요?

 

고구려의 멸망 : 중국에 수. 당의 통일 왕조가 들어서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는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과 양만춘의 안시성 싸움에서 이를 막아내며 우리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련자인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고구려는 나. 당연합군의 공격을 멸망하였습니다. 

 

2. 장수왕은 누구?

장 군 총

 

 고구려 제20대 왕인 장수왕 19대 왕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서 이름은 거련이며, 408년 태자로 책봉되어 413년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장수왕은 왕위에 올라 연호를 건흥으로 정하였는데 광개토대왕 때는 영락이라는 독자연호를 사용했었습니다. 연호는 왕의 통치 기간을 표시하는 호로 동아시아 국가는 대부분 중국에서 빌려서 사용했는데 연호를 독자 연호를 사용함으로 인해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며 고구려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장수왕은 왕위에 오른 해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해 국교를 맺고 414년에는 광개토대황비를 건립하였는데 지금은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거우에 위치합니다. 광개토대왕이 이니 북쪽으로 많은 영토를 확장하여 장수왕은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적극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였으며, 고구려 귀족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여러 세력과는 외교 관계를 통하여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중국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이전의 고구려와는 다른 정책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었습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첩자로 보내 개로왕의 환심을 사며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켰고, 475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살해하였습니다. 또한 481년에는 신라의 호명성 등 7개 섬을 점령하며 고구려의 영토는 서로는 요하, 동으로는 북간도 훈춘, 남으로는 아산만에서 죽령까지 이르게 되어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수왕은 부족제도를 지방제도로 고쳐 5부를 개설하는 등 내정개혁에도 힘쓰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하였습니다. 장수왕은 491년 9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고구려에서 가장 장수한 왕 중 한 사람입니다. 장수왕이 죽자 북위는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가운데 가장 높은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이라는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왕이라고 하였습니다. 

 

3.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석비로 1979년 조사되어 알려진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을 탐방해 보았습니다. 

공식 명칭은 '충주고구려비'이지만, 일반적으로 신라 시대 충주의 옛 지명에서 비롯된 '중원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으며, 원본은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높이 : 203m, 폭 : 55cm, 두게 : 33cm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으로 삼고 있습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로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고, 앞면과 좌측면 일부의 내용만 확인됩니다. 

 

 비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한 5세기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왕을 고려대왕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신라토내당주 등의 표현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이외에 고모투성, 대사자등 당시의 지명과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중원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큽니다. 특히 고구려의 금석문은 광개토대왕비 등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석비는 한반도의 중부 지역인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 높게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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