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1922년 7월 2일 ~ 2009년 2월 16일) 은 대한민국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사회운동가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가톨릭 추기경에 서임되었습니다. 본관은 광산,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아호는 옹기입니다.

1.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의 삶
군사 정권 당시 군사 독재정권 퇴진 운동과, 시민 활동을 하였습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부터는 사회 운동과 방송 활동, 복지사업, 언론 활동, 강연 활동 등을 하였습니다. 한국 카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수십 년간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권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공동선의 추구를 바탕으로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신상을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교구의 '산 펠리체 다 칸탈리체 첸토 첼레 성당' 명예주임사제직의 사제급 추기경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김수환은 1922년 7월 2일에 경상북도 군위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김수환의 할아버지인 김보현은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68에 발생한 '무진박해'로 인해 연산에게 관군에게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습니다. '무진박해'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그러던 중 1895년경 군위에 정착하고 그해 그곳에서 서중하와 결혼하였다. 어머니 서중하는 가난한 옹기장수인 김영석과 결혼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여덟 명의 자녀가 전부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 형 김동한과 김수환 2명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김수환은 8세에 군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1학년 재학 중 아버지 김영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 서중하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습니다. 그러나 김수환은 생전에 회고하기를 "어머니는 자식들 교육에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해주셨다. 그 대신 사친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2. 성직자의 길
그의 어릴 적 꿈은 상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하고서 25살이 되면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과 그리스도 신앙의 영향 등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그와 넷째 형 김동한은 어머니로부터 불려가 나중에 사제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그 길을 걷게 됩니다. 한편 어머니는 방랑벽이 있던 그의 맏형을 만주까지 찾아가 데려왔다고 하며 김수환은 훗날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사랑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군위공립학교에 다니다가 김수환의 가족들은 대구로 이사하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학하여 1935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서울대교구의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지속하였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열망]
1941년 4월에 20세의 김수환은 대구교구의 장학생으로 조치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점차 독립투쟁에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아동 잡지 월간 소년에 연재되고 있는 만화 전기 <혜화동의 할아버지>에서는 김수환이 신학수업 전통에 따라 본래는 로마에서 공부해야 하는데, 일제 강점기여서 조치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일본 유학시절 친일 성향의 일부 학생들과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부 교수들과 관리들의 부당한 처우로 방황했지만 독일인 가톨릭 사제의 격려로 학업을 지속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김수환은 학도병에 강제로 징집되어 동경 남쪽의 '후시마 섬'에서 일본 사관후보생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수환추기경께서 정식 사제가 되기 전 성신대 학생 시절 넷째 형 김동한이 사목하던 부산광역시 범일 성당을 방문, 성당 부설 보육원에서 일하며 가끔 사제관 잡일을 돕던 여인으로부터 청혼을 받았고, "나는 정말 사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일생일대의 고민을 했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제로의 길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한 여인을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고, 그보다는 많은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 좋겠다."라고 마음을 정리하고 결국 청혼을 거절하였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 마음이 1969년 그를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게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3. 사랑과 나눔 마을

2025년 11월 16일 군위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신과 인간을 향하여 아낌없이 나눈 사랑", "당신이 태어났을 때는 당신만이 울고 주위의 모든사람들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는 혼자 미소 짓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인생을 사십시오." 그가 남긴 이 말들이 가슴에 와 닿아 차가운 날씨에도 뜨거운 사랑이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_PRO VOBIS ET PRO MULTIS(프로 보비스 에트 프로 몰티스)" 이 말씀은 1966년 마산교구장주교로 서품되실 때 이 문구를 사목 표어로 선택하셨고, 이후 서울대교구장으로 부임하셨을 때도 이 표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셨듯이, 자신도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출처: 가톨릭신문]
그는 추기경이 된 후에도 변함없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권력과 자본 힘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지켰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때에도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난입하려 하자 "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이 있었습니다. 김추기경은 가만히 눈을 감고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당시 최장 재임 추기경으로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던 그는 2009년 2월 16일 향년 87세로 하나님의 품에 돌아갔습니다. 그는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며,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삶. 그것이 김수환 추기경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한 모습이 아닐었을까 묵상해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까지 바치시고 십자가상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십시오. 거기서 결론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신학대학 강좌, 198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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