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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퇴계 이황, 서원과 향약, 조선시대 신분제도

by 최미화 2026. 10. 28.

퇴계 이황선생에 대한 책을 읽다가 선생이 제자를 가르쳤다는 안동의 도산서원을 탐방해 보기로 했습니다. 도산서당을 비롯하여 서원과 향약에 대해서도 알아봅니다. 

1. 도산서원 - 한국 유학사에 큰 별 - 퇴계 이황

안동 도 산 서 원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이자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곳입니다.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냅니다. 퇴계는 본디 도산 남쪽에 도산서당을 짓고 자리 잡아 후학을 가르치다가 그 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의 자리로 옮겼으니 5년간의 공사 끝인 1561년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퇴계 선생의 말년인 61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 뒤 1570년에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서당의 뒤쪽에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1575년에 선조로부터 사액받았으며 서원을 꾸미면서 대대적으로 중창하여 서원의 형식을 정립하였습니다. 건물뿐 아니라 서원을 지탱하는 내부규칙인 서원안도 마련되어 후에 다른 서원들의 모본이 되었습니다.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도산서원은 경사진 곳에 자리 잡아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있어 위계질서가 매우 정연한 서원입니다. 서원은 본래 후학을 가르치고 선현을 제사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므로 건물 들고 그에 합당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개 서원의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앞쪽에 배움의 터인 강당을 두고 뒤쪽에 

모시는 분의 사당을 두는 형식입니다. 

 

  도산서원에서 만나는 인물은 퇴계이황선생입니다. '사액서원'은 임금의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을 말합니다. 도산서원의 현판은  선조임금 앞에서 한석봉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썼다고 합니다. 하마비는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신분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이랍니다. 도산서원을 가는 길에 '시사단'이 보이는데 퇴계 이황선생을 기리는 비가 있으며 이황을 추모하여 과거를 보았던 것을 기념하여 세운 곳입니다. 열정은 나의 지식이 샘물처럼 쏟아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농운정사는 퇴계 선생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입니다. 성학십도는 이황 선생이 왕(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입니다. (성왕 및 성인이 되기 위한 유교 철학을  그림을 첨부하여 설명한 책) 

 

 

 

2. 서원과 향약

서원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립된 사립 교육기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으며, 유학을 공부하고 성현의 가르침을 신천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방의 선비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서원이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주세붕은 1543년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여 후학을 가르쳤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백운동서원은 훗날 명종 때 퇴계 이황선생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습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으로부터 서원의 이름과 현판, 서적 등을 하사 받은 서원을 말합니다.

 

 서원에서는 유학 경전을 공부하고 학문과 인격을 수양했으며, 학문과 충절을 높이 평가받은 인물들을 모셔 제사를 지냈습니다. 서원은 단순히 공부하는 장소를 넘어 지방의 선비들이 학문과 사회 문제를 논의하고 유교적 가치를 이어가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향약

향약은 향촌, 즉 마을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주민들이 서로 돕기 위해 만든 자치 규약입니다. 조선 중종 때 개혁 정치를 추진한 조광조는 백성들의 생활 속에 유교 운리를 정착시키고 바람직한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  향약의 시행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중국 송나라의 여씨향약을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향약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네 가기 지본 덕목이 있었습니다. 첫째  '덕업상권'은 좋은 일과 바른 행동을 서로 권하고 장려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과실상규'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서로 일깨워 주고 바로잡도록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환난상휼'은 어려움이나 재난을 당한 이웃을 서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넷째. '예속상교'는 예절과 좋은 풍속을 바탕으로 서로 교류하며 화목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향약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권면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예의를 지키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지방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유교적 생활 규범을 정착시키고자 했습니다. 다만 향약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달랐으며, 지방 사족들이 향촌 사회의 질서를 주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서원이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교육. 제향 기관이었다면, 향약은 마을 사람들이 함께 지켜야 할 생활 규범이자 자치 규약이었습니다. 두 제도는 모두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가치와 질서를 지방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

훈구와 사림

조선왕조가 태조, 정종, 태조, 세종, 단종을 거치면서 왕권이 조금 약해졌고, 이때 왕권강화를 욕심냈던 임금이 세조입니다. 그러나 조카를 왕에서 내쫓고 죽이는 인륜적으로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해서 신하들이 반대를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 중심으로 세도정치를  했는데, 이때 세조를 도왔던 신하세력이 성장하게 되면서 '훈구'가 됩니다. 

 

 훈구가 중앙에 진출하면서 너무 신권이 강화되니까 성종이 이러면 안 되겠다고 해서 '사림'(길재학풍을 이어받아 지방에서 교육과 제사에 힘쓰던 조선의 유학자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함)을 중아에 등용시킵니다.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등용된 초기에는 훈구와 상대방의 비판을 인정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좋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은 훈구가 사람에게 보복을 한 것이 사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입니다. 

 

 훈구와 사림의 갈등은 4차례의 사화를 들 수 있습니다.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1489년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라는 글이 세조를 비판한 것이라는 훈구 세력이 공격으로 김종직의 많은 제자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 뒤 1504년 갑자사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 씨가 사약을 받고 죽은 일로, 연산군 즉위 이후 이에 찬성한 신하들과 사람들이 많이 처형당합니다. 이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 둘 다 피해를 보게 됩니다. 

 

1519년 기묘사화는 조광조 등이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훈구세력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받음으로써 다수의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1545년 을사사화는 왕실의 외척(대윤, 소윤)인 윤임과 윤원형 간의 권력 다툼으로 발생하였습니다. 이때는 대운파와 사림파가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훈구와 사림의 갈등은 4차례의 사화를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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