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진덕여왕 시절에 김춘추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외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660년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과 군사 5만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서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1. 문무왕, 그는 누구?
661년에 무열왕이 세상을 떠나자 서라벌로 돌아와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668년에 김유신, 김인문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당나라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문무왕은 마침내 삼한 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당나라가 삼한 땅을 차지하려 하자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고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675년에 매초성에서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다음 해에는 기벌포에서 당나라 장수인 설인귀가 이끄는 군대를 섬멸함으로써 당나라를 몰아내고 진정한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문무왕은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여 당나라 관복을 들여와 관제를 정비하고, 당나라의 음악을 받아들여 음악 발전에도 이바지하였습니다. 생전에 문무왕은 죽은 뒤에도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나라를 지키겠다며, 자신을 화장하여 동해안에 무덤을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문무왕의 유언
'"나는 어지러운 세상과 전쟁의 시대를 만나 서쪽을 무찌르고 북쪽과 싸운 결과 나라의 안정을 얻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부역을 덜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으며, 이 나라에 근심과 걱정을 없애고,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병을 얻어 곧 죽게 되었으니, 내가 가고 나면 내 이름만 남겠지.
나랏일은 주인이 한 시라도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곧 왕위를 잇도록 하라. 영웅과 같은 옛 왕은 마침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목동들이 올라가 노래하거나 여우와 토끼가 구멍을 뚫으니 무덤이란 것은 한 갓 재물을 허비하고 역사책에 비난을 남길지 모른다. 그러니 헛되이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영혼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 내가 죽은 지 10일 뒤에 화장하고, 상을 치를 때는 검소하게 하라. 백성에게 걷는 세금 중에서 필요치 않으면 모두 없애고, 율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쳐서 시행하라."
2.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는 문무왕의 바다 무덤 '대왕암'

26년 7월에 신라 30대 문무대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왕의 무덤인 대왕암에 가보았습니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 서당 10 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습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습니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실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문무왕의 은혜를 기리다!! '감은사 터'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지금은 3층 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습니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완성하였습니다.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3.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을 얻다!! '이견대'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입니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습니다. 신문왕은 해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습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합니다.
이견대하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입니다.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습니다.
만파식적이란?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습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합니다. 이 설화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영원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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