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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임진왜란, 명량/ 노량해전, 바다공원

by 최미화 2026. 10. 10.

  본관은 덕구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입니다.

 1545년(인종 1)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 (현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 씨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보성군수 등을 지낸 방진의 딸인 상주 방 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이 밖에 해주 오 씨와의 사이에 2남 2녀가 있었습니다. 자신과 나라의 역경을 극복한 이순신장군의 생애와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 _임진왜란과 해전

 이순신 장군은 30세 넘어서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습니다. 1583 부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586년 사복시 주부로 다시 관직에 나섰습니다. 이듬해 여진족의 습격을 당해 피해를 입으면서 감옥에 갇혔고, 패전의 책임으로 장형을 당한 뒤에 백의종군하게 되었습니다. 

 1589년 이산해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된 이순신은 1591년(선조 24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을 받아 경상도 해역으로 출정해 왜군과의 해전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6월 16일 옥포와 합포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고(옥포해전), 다음날에도 적진포에서 1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였습니다(적진포해전). 이 전투들에서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공으로 이순신은 종 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습니다. 7월 8일에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해 사천에서 서해로 북상하려던 왜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으며(사천해전), 이 전투에서 거북선이 처음을 실전에 배치되었습니다. 7월 10일 당포에서 왜선 21척을 불태웠으며(당포해전), 7월 13일에는 왜군이 도주해 진을 치고 있는 당항포를 공격해서 왜선 26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제1차 당황포해전). 이러한 잇따른 승리로 이순신은 정 2품 자헌대부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에게 잇따라 패배한 왜군은 수군의 모든 역량을 전라도로 집결해 맞서려 했습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8월 14일 견내량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한산도로 유인해 50여 척의 왜선을 격파. 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한산도대첩). 이러한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했고, 북상하던 왜군은 병력 보충과 군수품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으로 1593년 9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명량해전에서 대승, 노량해전의 전사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명량해전).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짐을 수 있었습니다. 한양으로 진공 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인대의 왜성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에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서 노량에서 500여 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 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노량해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습니다.

 이순신은 1604년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습니다.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707년(숙종 33)에는 충청도 아산에 세워진 그의 사당에 '현충'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 (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이순신 바다공원 _순국의 벽, 관음포만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전투가 노량해전이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장소인 노량바다가 어디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해대교를 넘어가면서 보이는 바다가 바로 노량으로 통영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입니다. 이곳이 바로 적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며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끝까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장수의 마음이 담긴 곳입니다.

 25년 12월 21일 역사체험으로 이순신 바다공원을 가보았습니다. 이 곳은 좌우로 호국광장과 관음포 광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호국광장에는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던 관음포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 해역을 볼 수 있었습니다. 

 관음포 광장에는 고려말 왜구를 무찌른 4대첨 중 하나인 정지장군의 관음포 대첩을 기념한 정지공원과 거란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만든 초조대장경을 기념하는 대장경공원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순국의 벽은 노량해전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한 명의 적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혈전을 거듭했던 곳입니다. 장군은 순국했지만 전쟁은 승리했고, 수많은 수군장병들의 희생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일상을 보낼 수 있다는 주제가 담긴 호국정신을 담아낸 벽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을 통해 2번씩이나 백의종군하게 되고,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끝내 바다에서 최후를 맞이한 장군에게 깊은 애도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충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순신 바다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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