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단어는 하루에도 수십 번 쓰이지만, 막상 "당신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막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그랬다. 이 글은 고대 플라톤부터 현대의 샌델까지, 철학자들이 쌓아온 정의의 계보를 짚어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실제로 마주치는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본 기록이다.
정의, 말은 쉬운데 정작 설명하기가 어렵다
"법을 지키면 정의로운 사람인가?" 이 질문을 처음 진지하게 생각한 건 얼마 전 한 책을 읽고 나서였다. 법과 정의가 같은 말인지 당연하게 여겼는데, 책을 덮고 나서는 그 전제 자체가 흔들렸다. 잘못된 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법이 곧 정의의 완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실제로 철학에서 정의(Justice)란 단순히 규칙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라, 각 개인과 공동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상태를 뜻한다.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출발해 수천 년간 논쟁과 비판을 거듭하며 지금의 형태로 발전해 왔다. 나는 이 과정을 추적하다 보면 "지금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Platon)은 서양 철학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 정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각자가 자신의 소질에 맞는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납득이 가는 말 같지만, 나는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나서 이 주장이 좀 다르게 느껴졌다. 열차의 꼬리 칸에 갇혀 17년을 버텨온 사람들에게 메이슨 총리가 하는 말이 플라톤의 논리와 닮아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라"는 말은, 기존의 불평등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소질에 따른 역할 분담이 처음부터 공정하게 결정된 것인지를 묻지 않으면, 그 정의는 기득권을 지키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스승 플라톤과 정의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공통점이 많았지만, 그보다 더 실증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동물학 연구에서도 방대한 관찰 기록을 남길 만큼 구체적인 사례를 중시한 철학자였는데, 정의 역시 이론이 아닌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정의란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것, 즉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에 가까웠다. 분배적 정의란 사회적 자원과 기회를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가에 관한 개념으로, 오늘날 복지정책이나 교육 기회 문제에서도 여전히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공리주의, 의무론, 그리고 정의론 — 세 갈래 핵심 분석
벤담(Jeremy Bentham)이 주창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것이 곧 정의라는 관점이다. 공리주의란 행위의 결과, 즉 전체적인 행복의 총량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 이론이다. 언뜻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소수의 희생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정당화될 수 있다. 내가 읽은 책에서도 이 부분이 가장 불편하게 다가왔다. 다수결이 언제나 정의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목격했기때문이다.
칸트(Immanuel Kant)는 결과보다 동기와 원칙을 우선시했다. 그는 독일 근대 철학의 기틀을 세운 인물로, 매일 오후 3시 정각에 산책을 나서 이웃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로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의 정의관도 이와 맞닿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도덕적 의무는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s)라 부르는데, 쉽게 말해 결과가 어떻든 옳은 일은 옳은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칸트는 일단 사형이 결정된 죄수라면 반드시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나중에 무고함이 밝혀진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칸트의 이론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롤스(John Rawls)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윤리학자이자 정치 철학자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의론"을 강의하고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해 학계와 대중 모두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의 핵심 개념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무지의 베일이란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태, 즉 부자인지 가난한지, 건강한지 아픈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사고 실험이다. 이 조건에서 사람들이 합의하는 규칙이라면 공정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다. 내가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는 꽤 설득력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반론도 있다. 샌델은 이 접근이 사람을 공동체나 역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추상적 존재로 가정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실제 우리는 특정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그 관계가 정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래는 세 가지 정의론이 실제 현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다른 답을 내놓는지 정리한 것이다.
1) 공리주의(벤담): 브레이크 고장 열차가 5명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방향을 틀어 1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더 많은 생명을 구하므로 정의롭다.
2) 의무론(칸트): 1명을 수단으로 삼아 희생시키는 것은 그 결과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3) 정의론(롤스): 무지의 베일 뒤에서 합의된 규칙이 있다면 그것이 기준이 되며, 어느 한 개인의 권리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침해되어선 안 된다.
샌델(Michael Sandel)은 현재도 활발하게 강의와 저술 활동을 이어가는 미국의 정치 철학자로,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한국에서도 정의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적 관점에서 정의를 바라본다. 공동체주의란 개인은 공동체의 역사, 문화, 관계 안에서 형성된 존재이므로, 정의도 그 맥락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나는 이 관점이 가장 현실에 가깝다고 느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정의의 문제는 언제나 구체적인 맥락 속에 있으니까. ("https://scholar.harvard.edu/sandel/home">출처: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 홈페이지
정의론을 일상에 적용하는 법 — 지금 내 주변을 다시 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정의란 다소 거창하고 멀리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점점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모른 척하는 것, 규칙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따르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정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의를 실제로 적용하려면 먼저 "이 상황에서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연습이 필요하다. 공리주의적 시각으로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로운 선택인지를, 의무론적 시각으로는 이 선택이 누군가를 순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를, 그리고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씌운 채 생각해 보면 내가 어느 위치에 있든 동의할 수 있는 규칙인지를 따져볼 수 있다.
물론 이 세 가지 기준이 항상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의는 한 번 배운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하고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정의와 인권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논의하며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처럼 정의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의 언어이다. ("https://www.humanrights.go.kr" 출처: 국가인권위원회
내 경험상 이런 철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사례를 놓고 각 철학자의 입장에서 판단해 보는 것이다. 영화 한 편, 뉴스 기사 하나를 읽고 나서 "플라톤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롤스라면 어떤 선택을 지지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정의에 대한 감각이 꽤 달라진다. 나도 <설국열차>를 다시 보면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꼈고, 그게 꽤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자주 묻는 질문
Q. 법과 정의는 어떻게 다른가요?
A. 법은 국가가 제정한 강제적 규범이고, 정의는 마땅히 옳다고 판단되는 도덕적 기준이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법이 존재했던 것처럼, 법이 반드시 정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법을 지키는 것과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Q. 공리주의의 가장 큰 한계는 무엇인가요?
A.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나 이익이 희생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과 중심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과정에서 발생하는 개인의 존엄 침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칸트나 롤스의 이론이 공리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Q.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 현실에서 적용 가능한가요?
A. 사고 실험으로서는 유용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샌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무지의 베일은 이상적 조건에서의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Q. 샌델의 정의론은 롤스와 어떻게 다른가요?
A. 롤스는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보고 보편적 원칙을 도출하려 했지만, 샌델은 개인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샌델에게 정의는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하고 도출될 수 없는 개념이다.
Q. 어린 학생이 정의에 대해 공부하려면 어디서 시작하면 좋을까요?
A.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칸트, 롤스, 샌델의 핵심 주장을 쉽게 정리한 입문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실제 영화나 뉴스 사례에 각 이론을 적용해 보는 연습을 병행하면 추상적인 개념이 훨씬 구체적으로 와닿는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읽는 것보다 사례 하나를 깊이 파고드는 방식이 처음에는 더 효과적이다.
정의는 한 번 정답을 배운다고 끝나는 개념이 아니다. 플라톤부터 샌델까지 수천 년 동안 계속 논쟁이 이어진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내가 이 주제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특정 이론이 아니라, 어떤 상황 앞에서도 "이게 과연 정의로운가"를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습관이었다. 이 글을 읽으신 분이라면 오늘 하루 일어난 작은 일 하나를 떠올리며 그 질문을 한 번 던져보시길 권한다. 거기서부터 나만의 정의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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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어린이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 안미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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