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조선왕실의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비극으로 꼽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수원 화성을 탐방해 보고, 화성에서 경관이 가장 돋보이는 방화수류정에도 올라가 봤습니다.

1. 영조(1694 ~ 1776)
조선 제21대 왕,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숙빈 최 씨입니다.
1699년 연잉군에 봉해졌습니다. 숙종 말년에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과 왕세자를 지지하는 소론의 대립을 겪었습니다. 경종이 즉위 한 다음 해인 1721년 노론의 주도로 왕세제에 책봉되었습니다. 곧이어 노론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면서 신임옥사가 일어나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1724년 경종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즉위 초부터 탕평을 기치로 내세워 즉위 직후 신임옥사를 일으킨 노론의 전제를 막았습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 대신들을 파직하고 소론을 등용했습니다. 1728년 소론의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도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를 고르게 등용해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이후에도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영조의 자기 신원이라는 목적이 개입되면서 노론 편중으로 흘렀지만, 탕평에 대한 영조의 노력과 성과는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건저와 대리, 삼수의 옥, 독살설,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점 때문에 재위 내내 정통성 시비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도세자 비극의 시발점이 된 선위 소동, 비극을 키운 대리청정도 그러한 시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영조는 신하들이 상대하기 힘들 만큼 학문 수준이 높았고, 저작물도 많이 남겼습니다. 눈물이 많고 다혈질이었으며 변덕이 심해 즉흥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냉정할 만큼 이성적이고 계획적이어서 모든 것이 철저히 정치적이었습니다. 영조는 조선의 왕들 중 가장 오래 살았고, 또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습니다. 자질도 우수했고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등 자세도 훌륭해서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2. 사도 세자 (1735 ~ 1762)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 씨입니다.
사도세자의 비는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 씨입니다. 서른다섯 살에 효장세자를 잃은 영조가 마흔두 살에 얻은 아들이어서 태어난 그날로 원자의 명호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고, 1744년 왕세자빈을 맞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일찍부터 영조와 떨어져 살아 부자의 정을 쌓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왕세자 수업이 시작된 이후에는 책 보다 무예를 더 좋아해 영조를 실망시켰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1749년 대리청정을 시작한 초기에는 당당한 체구에 위엄 있는 눈빛과 목소리까지 갖춰 신하들이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혈질에 변덕도 시한 영조의 미움과 멸시가 가득 담긴 질책이 반복되면서 병을 얻었습니다.
자신이 어렵게 이룬 정치적 안정과 튼튼한 왕권을 유지해 나갈 수계자를 원했던 영조는 그런 모습에 더욱 실망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해 잡희와 사냥 등에 열중하며 별것 아닌 일로 칼을 휘두르는 등 사람을 쉽게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762년 왕세자가 반역을 꾀한다는 나경연의 고변이 있은 뒤 아버지와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면서 광기를 보이자 생모인 영빈 이 씨의 고발이라는 형식을 빌려 영조가 자결을 명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자결하지 않자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습니다. 죽은 뒤 바로 사도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습니다. 1899년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습니다.
3. 정조 (1752 ~ 1800)
조선 제22대 왕,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사도세자이고, 어머니는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 씨입니다.
1759년 황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사도세자각 뒤주에 닫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참혹한 일을 겪었음에도 반듯한 자세에 성실한 공부와 빼어난 식견, 지극한 효성까지 보여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1775년 대리청정을 맡았으며,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즉위했습니다. 즉위하자마자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추존했으며, 더불어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묘소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높이고 경모궁이라는 묘호를 내렸습니다.
평생 책과 붓을 손에서 놓지 않은 학자이기도 해서 신하들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왕보다도 정사에 성실했으나 아버지 사도세자의 일에 너무 매달렸고, 그로 인해 탕평정책이 파탄되고 급기야는 척신정치의 배격이라는 자신의 기본 정치철학마저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786년 다섯 살인 문효세자를 잃고, 1790년 화성 행궁이 완성된 직후 태어난 원자가 열다섯 살이 되면 왕위를 물려준 뒤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모시고 내려가 지내기 위해 행궁이 있는 화성에 성곽을 세우고 자신과 어린 왕을 호위하기 위해 장용영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1800년 원자를 세자에 책봉하고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내정함으로써 그토록 혐오했던 척신정치의 부활을 초래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곧이어 노론 벽파를 향한 경고의 뜻을 담은 오 회 연교를 내린 뒤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한 달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원 화성
정조가 그의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사용해 만들어졌습니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습니다.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의 개혁 군주인 정조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도시이자,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성곽입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 세자는 정조가 어렸을 때, 영조 임금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 갇혀 세상을 떠난 비운의 왕자였습니다. 따라서 정조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으며,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정조는 죽은 아버지에게나마 효도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무덤을 조선에서 제일 좋다고 소문이 난 땅으로 옮기려 했는데, 이때 선택한 땅이 현재 사도 세자의 무덤이 있는 '융릉(경기도 화성시 소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도 세자의 새 무덤이 들어설 자리는 수원부(현재의 수원 시청)가 있는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고민했습니다.
아마 마음보가 나쁜 임금이었다면, 사람들을 강제로 내쫓고 무덤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조는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했던 현명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수원부 사람들 모두가 집단으로 이주할 장소를 마련하고, 집을 지을 돈과 이사 비용까지 두둑하게 주어서 사람들을 새 도시로 이주시켰습니다. 바로 이때 만들어진 도시가 현재 수원 시내로, 새로 만든 수원부 전체를 들러쌓은 성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입니다.

방화수류정: 화성에 있는 네 군데 각루 중 하나입니다. 각루는 성 밖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는 요충지에 세운 시설물입니다. 화성의 동북쪽에 자리 잡은 방화수류정은 아래에 있는 용연과 함께 절경을 이루어서 화성에서 경관이 가장 돋보이는 곳입니다. 벽면의 십자가(+) 무늬는 조선 시대 건축 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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