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에 한. 일 명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조선 총독부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우리 민족은 모두 자주권을 잃었습니다. 이후 일제는 우민 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을 말살하려고 했으며, 철도, 토지, 광산 등 모든 산업 분야에서도 이권을 독점하여 한민족을 궁핍한 생활에 빠뜨렸습니다. 삶의 터전을 잃은 노종자나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만주로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1. 독립을 향한 열망
1919년 3월에 산하를 뒤흔든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나라 잃은 국민의 원통함과 절실함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 공원에서 불붙은 만세 운동의 불씨는 이후에 전국 방방 곡곡을 떠돌며 1년이 넘도록 계속 타올랐습니다.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역시 3.1운동 후에 일어난 수많은 만세 운동 중의 하나였습니다.
기생도, 백정의 아내도, 그리고 친일파까지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곳은 태화관이었는데, 이 곳은 기생들이 술을 파는 기방이었습니다. 당시의 기생은 낮은 신분이었지만, 우리 민족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생들은 각 지역마다 조합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사상 기생' 또는 '애국 기생'이라고 불렀습니다.
3월 19일 진주 기생들이 시위의 선두에 섰을 때는 이 모습에 자극을 받은 백정의 아낙네들이 칼을 들고 떼 지어 나와 독립 만세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체포하여 이마에 '백정'이라고 글자를 새기는 악랄한 짓까지 했지만, 독립을 향한 열망까지 없애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협력하여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까지 받았던 김윤식, 이동직 등도 3.1 운동에 참여하였으니, 한민족으로서의 애국심은 한때 나라를 배반했던 친일파에게도 살아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 대표 33인
3.1운동 때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민족 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습니다. 천도교 대표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의 15명이, 크리스트 교 대표로는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의 16명이, 불교 대표로서는 한용운과 백용성의 2명이 서명, 날인했습니다. 이들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 지방은 물론 남부 지역에서 시위를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3월 1일 탑골 공원(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 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겼습니다. 이들은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독립 선언식을 가졌고, 일본 경찰에 미리 알려 스스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로
써 민족 대표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으며, 이후 학생과 시민들 스스로가 독립운동을 조직하고 추진하였습니다.
2. 애국심을 품은 어린 소녀

유관순은 1902년 충청 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오늘날의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아버지 유증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관순은 5 남매 중 셋째로서, 위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었고, 아래로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맏딸 유계출은 일찌감치 박창봉과 결혼을 해서 다른 형제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습니다. 세 살 위인 오빠 유우석은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강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유관순과 뜻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관옥이라고도 불린 유우석은 유관순과 마찬가지고 만세 운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두 살 터울의 동생 유인석과 아홈 살 차이가 나는 막내 유관석은 훗날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났던 만세 운동으로 갑자기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누나와 형이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의지할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할아버지마저 아우내 만세 운동 뒤에 사망해 버렸으므로 두 사람은 고아가 되어 이리저리 떠 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강원도 양양군의 3.1 운동을 주동한 조화벽이 이 두 경제를 강원도록 데려가 공부도 시키고 결혼도 시켜 주었습니다. 조화벽은 나중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과 결혼했습니다.
뿌리 깊은 유교 사상
유관순의 집안은 1695년 무렵 충청 남도에 정착하였는데, 유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충효의 정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몽인은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두 왕에게 충성할 수는 없다고 하며 조정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효자로 이름난 유영일과 구한말의 의병장 유인석도 같은 집안사람입니다. 유관순의 집안이 크리스트 교로 개종한 것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계락에 말려들어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후였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의 아버지는 크리스트 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고집스럽게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유교적 전통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을사늑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입니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외교권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된 것은 조약이 체결된 지 이틀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을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을 실었습니다.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맞고 있던 민영환은 고종 황제와 2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유서를 써 놓고 삶을 포기했습니다. 피 흘리는 통곡과 애통한 죽음은 비단 지식인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혼란은 온 국민의 정신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3. 기미년 3월 1일
이화 학당 학생들의 자치 모임인 이문회는 2월 28일에 정기 모임을 열어 3월 1일의 만세 운동에 동참하기고 결의했습니다. 전교생이 소복을 입고 대한문 앞으로 나아가 고종의 죽음을 통곡을 하고 만세를 부르자는 것이었습니다. 유관순은 예도 언니를 비롯하여 서명학, 주현숙, 김분옥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의 준비로 밤잠을 설치고 있었습니다. 유관순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극을 그리고 괘를 그렸습니다.
이문회의 이러한 결정은 곧 프라이 교장에게 전해졌습니다. 교장으로서는 학생들의 용기를 복돋워 줄 수도,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일어 었습니다.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 너무 위험한 일이니 너희는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한다." 선교사들은 학생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부탁했습니다. 특히 유관순에게는 몇 번이나 당부를 했습니다. 유관순이 움직이면 또래의 학생들이 모두 그를 따라나설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자리였습니다. 프라이 교장은 교문을 잠그고 선교사들에게 교정 곳곳을 지키라는 말밖에 다른 할 말이 없었습니다.
조선은 독립국이다!
드디어 기미년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학당 정문을 지키는 수위와 선배들 사이에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유관순은 정문으로 나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뒤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정문을 뚫고 나온 샌배 열댓 명과 함께 대한문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거리는 온통 소복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대한문은 통곡 소리로 진동했습니다.
탑골 공원에 도착하니 학생 대표 정재용이 3.1독립 선언서를 들고 팔각정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원래는 각 계층을 대표하는 민족 대표 33인이 3.1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것을 염려한 민족 대표들은 공원 옆 음식점이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일본 헌병대에 연락해 스스로 잡혀갔습니다. 탐골 공원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군중은 초조해졌습니다. 그래서 정재용이 3.1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민족인 것을 선언한다."
유관순은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우리 나라는 독립국이다! 나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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