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만 배웠던 역사적 사실을 경험하기 위해 만옥정 공원(창녕공원)을 탐방해봅니다. 면적은 1만 ㎡ 규모로 작은 도시공원이지만, 지정문화재와 봄철의 벚꽃으로 유명합니다. 약 250년 전에 만옥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봄마다 명창 대회와 그네뛰기 대회가 열렸다고 전해집니다. 화왕산으로 가는 등산로가 옆으로 나 있습니다. 진흥왕척경비와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심지어 객사와 퇴천 삼층 석탑까지 역사의 보물공원이라 할 만 합니다.
창녕 : 선사 및 가야시대
창녕군은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고인돌)와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 등지에 산재한 고분군들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 땅에 인류가 취락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남방식 지석묘의 대표적인 것으로, 장마면 유리의 지석묘는 7기가 있었으나 현재 1기뿐이며, 부곡면 온정리의 고인돌과 고분, 도천면 일리와 영산면 신제리의 지석묘, 계성면 사리의 사은암 등은 지석묘로 모두 선사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생활한 흔적입니다.
기록에 나타나기는 1세기 전후의 시대로 삼국지에 변진 24국의 소개에 나타나 있는 불사국이 본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가야시대에는 불사국 또는 비화가야로 존립하여 오다가 일찍이 신라에 병합되어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 비자벌이라 하였습니다. 영남의 중추인 낙동강을 자양으로 번성하여 온 창녕군은 초기국가이던 옛 가야를 거쳐 신라에 이르러 나뉘어 있던 여러 현이 합하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창녕의 군화는 국화입니다. 사군자의 하나인 국화는 군내 전역데 자생하고 있으며, 그 꽃은 풍성함과 안정감이 있어 창녕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군목은 은행나무입니다. 목재(가구재, 조각재, 기구재), 잎(비료), 나무(정원수, 공원수) 바르고 웅장한 나무의 자태는 안정과 번영을 상징하며, 긴 수명은 창녕의 무궁 안 발전을 상징합니다. 군조는 백로입니다. 백로는 예부터 청렴 결백한 선비를 나타내왔으며 호국충절의 얼이 서린 선비의 고장 창녕을 상징합니다.
창녕의 역사 보물 창고 만옥정 공원
진흥왕 척경비
만옥정 공원 뒤쪽 언덕 위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비인 신라진흥왕척경비(곡보)가 있는데, 561년 (진흥왕 2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창녕읍 화왕산록에 있던 것을 1924년에 이곳을 옮겨왔습니다. 또한 공원에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물인 창녕객사(경남유형문화재),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토천 삼층석탑(경남유형문화재), 창녕척화비(경남문화재자료)등이 있으며, 조성면적 약 660㎡에 334개의 관람석을 갖춘 야외공연장이 있습니다.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을 세운 비입니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 또는 비자화군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입니다. 다른 수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합니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녀ㅁ,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주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긱,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ㅈ년 (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황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입니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 [삼국사기]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박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만옥정 객사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 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창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습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밭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으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지어진 건물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됩니다.
퇴천 삼층 석탑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탐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 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탐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보습이빈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동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지붕들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습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이ㅐㄹ부가 약간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UN 전적비(창녕지구 전승 기념비)
건립일 : 1959년 3월 31일
한국전쟁(6.25전쟁)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남쪽 부곡, 오항, 박진나무를 정점으로 방어 중이던 미 제24사단과 미 제2사단 제19연대가 북한군 제4사단과 돌출부인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역습에 역습을 거듭하였습니다. 13일간(1950년 8월 6일 ~ 19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북한군 제 4사단을 재차 낙동강 전선에 참가하지 못하게 했던 이 불후의 공훈을 길이 빛재는 동시에 그 영령을 위로 하고자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1959년 건립된 이 기념비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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